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상진 할복 사건 (문단 편집) == 사건과 영향 == 1975년 4월 11일 오전 11시 수원에 위치한 서울대학교 농대 잔디밭에서는 농대생 300명이 모여 성토대회를 가졌는데 일주일 전인 4월 4일의 시위에서 박정희 정권에 의해 구속된 구속학생을 석방하기 위해 열린 대회였다. 대회에서는 여러 명이 나와서 연설을 했는데 11시 20분 즈음에 3번째 연사로 등장한 사람이 김상진이었다. 그는 '''「양심선언문」'''[* 이 글은 할복 이전에 그가 작성한 것이었다. 김상진은 이 외에도 「대통령께 드리는 공개장」을 써서 박정희의 퇴진을 정중하게 요구하기도 했다으며 거기서 끝나지 않고 두 문건을 낭독하여 녹음한 뒤 그 테이프를 [[기독교방송]]국에 보냈다. [[https://www.youtube.com/watch?v=F87APbMEvqY|양심선언 육성녹음 일부]]]'''을 낭독한 뒤 가지고 있던 [[과도]]를 꺼내 [[할복]]했다.''' 피투성이가 된 그는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가면서 친구들에게 [[애국가]]를 불러 달라고 하였다. 그렇게 수원도립병원으로 옮겨져 두 번의 수술을 받았으나 이튿날인 4월 12일 오전 8시 55분 즈음 25살의 나이로 끝내 숨을 거두었다. 이것이 '김상진 할복 사건'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유신헌법 철폐와 정권퇴진을 요구하는 민주화 운동이 더욱 거세게 일어나자 박정희는 5월 13일 '''유신헌법에 대한 일체의 언급이나 논의를 금지'''하는 긴급조치 9호를 발표했다. 사건 발생으로부터 약 1달 후인 5월 22일에는 긴급조치 9호가 선포된 가운데 1천여 명이 '김상진열사 추도식'을 거행한 후 긴급조치 9호의 철폐를 외치는 대규모 시위를 감행했다. 이 시위로 인해 [[한심석]] 서울대학교 총장이 사임하고 박현식 [[경찰청장|치안본부장]], 서울남부경찰서장이 경질되었으며 29명의 학생이 구속되었는데 이를 '''오둘둘 사건'''이라고 한다. 민주회복국민회의에서는 4월 22일 오후 [[명동성당]] 문화관에서 김상진의 추도식을 가졌다. [[윤보선]] 전 대통령은 김상진 추도식에 참석하려고 하였으나 그날 아침 경찰관들이 사저에 모여들어 윤보선의 바깥 출입을 막았는데 추도식에 참석하지 못하게 불법적으로 연금시킨 것이다. 그가 죽은 뒤 5년이 지나고 유신정권이 무너진 [[1980년]] [[4월 11일]]에야 서울대학교 농대 교정에서 그의 장례식이 치러질 수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